2010년 05월 12일
천년호 (1969, 신 상옥)
천년호는 1000년 묵은 여우를 소재로 한 판타지물이다. 퇴마로 호수에 봉인되었던 1000년 묵은 여우의 영혼이 원랑의 아내 여화의 몸에 들어온다는 구전설화적인 내용이다. 최근 제3회 시체스 환상 공포 영화제 황금감독상 수상으로 관심이 더욱 증폭된 영화이다. 영화의 개봉당시 메인카피는 <지옥마왕의 명을 받고 왔다. 육천 세계를 내가 지옥으로 만들리라...> 였다고 한다. 지금 보아도 섬뜩해지는 말이다. 당시 천년호는 공포영화로 개봉을 했다. 흐르는 피, 공포스러운 녹색과 적색의 조명, 난데없이 벌떡 일어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구미호... 하지만 충분히 무서울 수 있는 장치들임에도 정확히 40년이 흐른 후에 보니 공포영화 라기보다는 시대물같이 느껴졌고 가끔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디어를 짜내어 새롭고 기발한 기법을 사용한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공중제비를 도는 여화를 표현하기위해 여화와 체구가 비슷한 곡예단의 사람을 사서 와이어로 공중제비를 도는 장면을 녹화한 필름을 되감았을 것이다. 
천년호는 화면비가 가로로 조금 더 넓었다. 천년호의 화면 비는 2.35:1의 와이드 스크린, 즉 시네마스코프라고도 불리는 화면 비다. 와이드스크린은 1950년대 초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들이 텔레비전으로 인한 관객 감소를 막기 위해 도입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와이드스크린으로 제작된 영화는 1958년 <생명>이라는 백치 아다다를 연출한 이강천 감독님의 작품이었다. 천년호는 이보다 11년 늦게 와이드 스크린을 사용했다.
공중제비를 도는 여화, 춘화추동을 한 자리에서 견디는 원랑, 여화의 잘린 팔의 효과는 현재라면 CG나 특수효과, 후반작업등을 통해 간단히(?)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와이어조차도 갓 쓰이기 시작한 60년대에는 이를 간단히 해결하기 어려웠을 것 이다.
꽃이 피고 나무가 우거지고 낙엽이지고 눈이 내리는 가운데의 원랑을 표현하기 위해 연출부 스탭들은 눈을 만들어 뿌리고, 낙엽을 뿌렸을 것이다. 또한 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해 수작업으로 광학효과를 만들어 사용했을 것이다. 나는 영화 전체에서 이 씬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기발한 특수효과뿐만이 아니라 연출 적으로 너무도 매력적인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망부석처럼 여화의 앞을 지키고 앉은 원랑에게 춘하추동의 시간이 흘러가는데 나는 이 시간이 일 년이 아닌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시각적으로는 은행나무 침대의 눈을 맞고 있는 황 장군이 연상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오마주라고 생각될 정도로 느낌이 비슷했다.) 가질 수 없는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단지 기다림 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장면은 장예모 감독의 2004년 작 <연인>에서도 볼 수 있다. 장쯔이를 사이에 두고 펼치는 유 덕화와 금 성무의 대결에서 눈이 내리고 낙엽이 지며 마치 천년호에서 보여진 것 같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장 예모가 이 씬을 연출한 것에 언론들이 엄청난 찬사를 보냈던 것이 기억나는데, 무려 45년 전에 신 상옥 감독이 이런 장면을 앞서 연출했다는 것이 괜히 자랑스러웠다.
# by | 2010/05/12 23:27 | 영화 | 트랙백 | 덧글(1)






